교황 보니파시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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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니파시오 9세는 1389년부터 1404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그는 나폴리 귀족 출신으로, 교황 선출 이전에는 신학이나 교황청 업무에 능숙하지 않았지만, 분열된 시기에 필요한 신중함과 재치를 갖추었다. 그는 로마의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고 교황령을 재건하는 데 힘썼으나, 서방 교회의 대분열을 해결하지 못했고, 성직 매매와 같은 재정 문제로 비판받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독일 등에서 교황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며, 1404년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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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보니파시오 9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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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정보 | |
존칭 접두사 | 교황 |
이름 | 보니파시오 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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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로마 주교 |
본명 | 피에트로 치보 토마첼리 |
교회 | 가톨릭교회 |
임기 시작 | 1389년 11월 2일 |
임기 종료 | 1404년 10월 1일 |
이전 교황 | 우르바노 6세 |
다음 교황 | 인노첸시오 7세 |
반대 교황 | 아비뇽 교황청 주장자: |
서품 | 알 수 없음 |
서품자 | 알 수 없음 |
주교 서임 | 1389년 11월 9일 |
주교 서임자 | 프란체스코 모리코티 프리아니니 |
추기경 임명 | 1381년 12월 21일 |
추기경 임명자 | 우르바노 6세 |
출생일 | 대략 1350년 |
출생지 | 나폴리, 나폴리 왕국 |
사망일 | 1404년 10월 1일 (54세)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이전 직책 | 산 조르조 인 벨라브로 성당 추기경 (1381–1385)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 사제 추기경 (1385–1389) 라테라노 대성전 수석 사제 (1388–1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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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로마자 표기 | Bonifatius IX |
이탈리아어 표기 | Bonifacio IX |
참고 자료 | 바티칸 웹사이트 |
2. 교황 선출 이전
피에트로 토마첼리는 1350년경 나폴리에서 태어나 제노바와 나폴리 왕국 카사라노에 기반을 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추기경이 되었으나 교황 선출 이전의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시대 독일 자료에 따르면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그가 문맹이었다고 주장했다.[11]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종하자, 아비뇽의 대립교황 측은 프랑스 왕 샤를 6세를 통해 로마 추기경들이 자신을 후계자로 추대하여 분열을 종식시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로마 추기경들은 토마첼리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2. 1. 출생과 가문
피에트로 토마첼리는 1350년경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노바와 나폴리 왕국 카사라노에 기반을 둔 귀족 가문인 톰마소 치보의 후손이었다. 동시대 독일 자료를 바탕으로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그가 문맹이었다고 주장했다(nesciens scribere etiam male cantabat).[11] 그는 뛰어난 신학자나 행정가는 아니었지만, 어려운 시기에 신중하고 요령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11] 루트비히 파스토르는 그의 재임 기간을 "교회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로 묘사하며, 그가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킬 만한 관대함을 갖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1]2. 2. 초기 경력
피에트로 토마첼리는 1350년경 나폴리에서 태어났으며, 제노바와 나폴리 왕국 카사라노에 기반을 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교황이 되기 전 그의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시대 독일 자료에 따르면,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그가 문맹이었다고 주장했다.[11]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종하자, 아비뇽의 대립교황 측은 프랑스 왕 샤를 6세를 통해 로마 추기경들이 자신을 후계자로 추대하여 분열을 종식시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로마 추기경들은 토마첼리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나 행정가는 아니었지만, 전임자와 달리 신중하고 요령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루트비히 파스토르는 그의 치세를 "교회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로 묘사하며, 그가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킬 만한 도량이 없었다고 평가했다.[11]
1389년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후, 독일, 잉글랜드,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 대부분이 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아비뇽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으며, 보니파시오 9세와 클레멘스 7세는 서로를 파문했다.[12]
토마첼리가 선출되기 전날,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14명의 추기경이 로마에 남아 있었다. 한편, 아비뇽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앙주의 루이 2세를 나폴리 왕으로 대관시켰다. 라디슬라오는 1386년 암살당한 나폴리의 샤를 3세의 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 두라초의 마르가레타는 전통적으로 로마에서 교황을 지지한 가문 출신이었다. 보니파시오 9세는 1390년 5월 29일 가에타에서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국왕으로 대관시켰고, 이후 10년 동안 이탈리아 남부에서 앙주 가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협력했다.[12]
2. 3. 교황 선출 과정
피에트로 토마첼리는 1350년경 나폴리에서 태어났으며, 제노바와 나폴리 왕국 카사라노에 기반을 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교황이 되기 전까지의 경력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시대 독일 자료에 따르면 니하임의 디트리히는 그가 문맹이었다고 주장했다.[11]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종하자, 아비뇽의 대립교황 측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외교를 통해 로마 측 추기경들이 자신을 우르바노 6세의 후계자로 추대하여 분열을 종식시킬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로마 측 추기경들은 토마첼리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나 행정가는 아니었지만, 전임자와는 달리 신중하고 요령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루트비히 파스토르는 그의 치세를 "교회 역사에서 가장 슬픈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로 묘사하며, 그가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킬 만한 도량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11]
1389년 콘클라베에서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독일, 잉글랜드,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 대부분이 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아비뇽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으며, 보니파시오 9세와 클레멘스 7세는 서로를 파문했다.[12] 토마첼리가 선출되기 전날, 로마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14명의 추기경이 로마에 남아 있었다.
한편, 아비뇽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앙주의 루이 2세를 나폴리 왕으로 대관시켰다. 라디슬라오는 1386년 암살당한 나폴리의 카를로 3세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두라초의 마르가레타는 전통적으로 로마에서 교황을 지지해온 가문 출신이었다. 보니파시오 9세는 1390년 5월 29일 가에타에서 라디슬라오를 나폴리 왕으로 대관시켰고, 이후 10년 동안 이탈리아 남부에서 앙주 가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협력했다.[12]
3. 교황 선출 이후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산탄젤로 성을 요새화하고 다리를 놓는 등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페루자와 아시시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오스티아 항구를 주교급 추기경으로부터 환수하였다. 또한 교황령의 주요 성과 도시들의 통치권을 되찾아 15세기 교황령 재건의 기반을 마련했다.[12]
1391년 10월 7일, 스웨덴의 비르지타를 시성했다. 페라라 대학교(1391년), 페르모 대학교(1398년), 에르푸르트 대학교(1392년) 설립을 지원했다.[12]
1404년, 병을 앓다가 선종했다.[12]
3. 1. 서방교회 대분열과 대립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산탄젤로 성을 요새화하는 등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했다.[12] 또한 교황령의 주요 성과 도시들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아 15세기 교황령 재건의 기반을 마련했다.[12]1394년 아비뇽에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선출했다.[12] 이후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바츨라프 4세 등으로부터 교황직 사임을 요구받았으나 거부했다.[12] 서방 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세계 공의회 소집 요구에도 불구하고, 보니파시오 9세 재위 기간 동안에는 공의회가 소집되지 않았다.[12]
보니파시오 9세 치세 동안 로마에서는 두 차례 성년이 거행되었다.[12] 1390년의 첫 번째 성년은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언한 것으로, 독일,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잉글랜드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방문했다.[12] 1400년의 두 번째 성년은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았다.[12]
1399년 후반에는 프로방스 지역에서 비안키 혹은 알바티(하얀 속죄자)라고 불리는 무리가 나타났다.[12] 이들은 채찍으로 스스로 몸을 때리는 고행을 하며 종말론 등을 퍼뜨렸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처음에는 이들을 높이 평가했지만, 결국 지도자를 화형에 처하고 무리를 해산시켰다.[12]
잉글랜드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성직 임명 관행에 반대하는 등 교황에게 적대적인 설교를 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성직록의 첫 해 수입 절반을 교황청에 귀속시키는 제도를 도입하고 성직록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비리를 저질렀다.[12] 잉글랜드 의회는 교황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하는 법을 승인했고,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의 반발에 물러섰다.[12] 1396년 런던 시노드에서 잉글랜드 주교들은 위클리프를 단죄했다.[12]
독일에서는 1400년 선제후들이 바츨라프 4세를 독일 국왕에서 폐위시키고 루프레히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12] 1403년 보니파시오 9세는 바츨라프 4세의 퇴위와 루프레히트의 즉위를 인정했다.[12]
1398년과 1399년에 보니파시오 9세는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에게 위협받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를 돕기 위해 유럽 국가들에 호소했지만, 당시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기는 식은 상태였다.[12]
3. 2. 로마 통치권 확립과 교황령 재건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산탄젤로 성과 다리들을 요새화하고 로마 시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했다.[12] 그는 오스티아 항구를 주교급 추기경으로부터 환수하고, 교황령의 주요 성과 도시들의 통치권을 되찾아 15세기에 교황령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12]1394년 아비뇽에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한 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선출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바츨라프 4세 등으로부터 교황직 사임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했다.[12]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세계 공의회 소집 요구가 있었으나,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2]
보니파시오 9세의 치세 동안 로마에서는 두 차례의 희년이 있었다.[12] 1390년의 첫 번째 희년은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언한 것으로, 독일,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잉글랜드 등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했다.[12] 1400년의 두 번째 희년에는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았다.[12]
1399년 후반, 프로방스 지역에서 시작된 '비안키'(하얀 속죄자)라고 불리는 채찍질 고행단이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로 퍼져나갔다.[12] 이들은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흰 옷을 입고 십자가를 든 지도자를 따라 행진하며 종말론적인 소문을 퍼뜨렸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처음에는 이들의 종교적 열정을 높이 평가했으나, 지도자를 화형에 처하고 이들을 해산시켰다.[12]
잉글랜드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성직 임명 관행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성직록 첫 해 수입의 절반을 교황청에 귀속시키는 제도를 도입하고, 성직록 매매를 통해 재정을 충당했다.[12] 잉글랜드 의회는 교황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제정했고, 보니파시오 9세는 결국 잉글랜드 왕의 요구를 수용했다.[12]
독일에서는 1400년 선제후들이 바츨라프 4세를 폐위하고 루프레히트를 새 독일 왕으로 선출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1403년 바츨라프 4세의 퇴위와 루프레히트의 즉위를 인정했다.[12]
1398년과 1399년, 보니파시오 9세는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위협받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를 돕기 위해 유럽 국가들에 호소했으나,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기는 식은 상태였다.[12] 그는 스웨덴의 비르지타를 시성하고, 페라라 대학교(1391년), 페르모 대학교(1398년), 에르푸르트 대학교(1392년) 설립에 기여했다.[12]
3. 3. 성년과 종교 운동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고, 교황령의 주요 성과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되찾아 15세기에 나타날 교황령의 모습을 재건했습니다.[12] 그는 산탄젤로 성과 다리들을 요새화하고, 오스티아 항구를 추기경 주교로부터 빼앗았습니다.[5]1394년 아비뇽에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베네딕토 13세를 선출했습니다. 이후 보니파시오 9세는 퇴위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했습니다.[12] 서방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전례회의를 소집하라는 압력이 커졌지만, 보니파시오 9세 재위 기간에는 공의회 운동이 진전을 보이지 못했습니다.[4]
보니파시오 9세의 치세 동안 로마에서는 두 차례 희년이 거행되었습니다. 1390년의 첫 번째 희년은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포한 것으로, 독일,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영국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1400년의 두 번째 희년은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수많은 순례자가 로마를 방문했습니다.[12]
1399년 후반, 프로방스 지역에서 자행자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흰색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 등 부분에 붉은 십자가를 그리고 행진했습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이들의 지도자를 화형에 처하고 무리를 해산시켰습니다.[12]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성직 임명 관행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보니파시오 9세는 ''annates perpetuæ''라는 수입을 도입하여 성직록의 첫해 수입 절반을 로마 교황청에 귀속시켰습니다. 영국 의회는 교황 임명에 대한 거부권을 왕에게 부여하는 법령을 승인했습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의 반발에 물러섰지만, 1396년 런던 시노드에서 잉글랜드 주교들은 위클리프를 단죄했습니다.[12]
독일에서는 1400년 제후 선제후들이 벤체슬라스를 폐위시키고 루퍼트를 새 독일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1403년 보니파시오 9세는 루퍼트를 왕으로 인정했습니다.[12]
1398년과 1399년에 보니파시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는 술탄 바예지드 1세에 맞서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를 도울 것을 유럽 국가들에 호소했으나, 당시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기는 식은 상태였습니다. 1391년 보니파시오 9세는 스웨덴의 비르지타를 시성했습니다. 페라라 대학교(1391년),[5] 페르모 대학교(1398년), 에르푸르트 대학교(1392년)가 보니파시오 9세의 도움으로 설립되었습니다.[12]
3. 4. 재정 문제와 성직 매매 논란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고, 교황령의 주요 성과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아 15세기에 나타날 교황령의 모습을 재건했다.[5] 그러나 그의 치세는 재정 문제와 성직 매매 논란으로 얼룩졌다.보니파시오 9세는 현금이 부족하여, 수혜직 거래, 사면 판매 등 여러 재정적 방법을 동원했다. 특히, 공석이 된 성직뿐만 아니라 공석이 예상되는 성직까지 판매하고, 더 많은 돈을 제시하면 기존 판매를 무효화하는 행위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4] 동시대 관찰자인 디트리히 폰 니임은 같은 수혜직이 일주일에 여러 번 팔리는 것을 목격했고, 교황이 미사 중에도 비서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4]
이러한 재정 정책은 서방 분열 동안 로마 교황청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잉글랜드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의회는 프로비저 법령과 프라에무니레 법령을 통해 잉글랜드 내 교황 임명에 대한 왕의 거부권을 강화했다. 결국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 왕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4]
교황청은 연고주의에 빠져, 보니파시오 9세는 그의 어머니, 형제, 조카들을 후하게 지원했다. 이러한 행태는 훗날 로마, 특히 독일에 대한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4]
1399년 후반에는 "비앙키" 또는 "알바티"라고 불리는 자행자 무리가 나타나 종교적 혼란을 야기했다. 보니파시오 9세는 처음에는 그들의 종교적 열정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들의 지도자를 화형에 처하고 무리를 해산시켰다.[4]
보니파시오 9세는 존 위클리프의 반성직주의 설교에 맞서 잉글랜드 주교들이 위클리프를 단죄하도록 했다.[4] 또한, 독일 왕 벤체슬라스의 폐위와 루퍼트의 옹립 과정에 개입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5]
1391년에는 페라라 대학교를, 1398년에는 페르모 대학교를 설립하고, 1392년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를 승인하는 등 교육 분야에도 기여했다.[4][5]
1390년과 1400년에는 로마에서 두 차례 희년을 거행하여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했다. 특히 1400년 희년은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많은 프랑스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았다.[4]
3. 5.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1400년 8월 20일 독일 제후들은 렌스에서 회합을 갖고 바츨라프 4세를 독일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바이에른 공작 루프레히트를 새 독일 국왕 후보자로 선출했다. 1403년 보니파시오 9세는 바츨라프 4세의 퇴위와 루프레히트의 국왕 즉위를 인정했다.[12]1398년과 1399년에 보니파시오 9세는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자 그리스도교 유럽 국가들에게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를 도울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는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기가 거의 식은 상황이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서방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리처드 2세, 프랑크푸르트 의회, 바츨라프 4세 등은 보니파시오 9세에게 교황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라는 요구가 커졌지만, 보니파시오 9세 재위 기간 동안에는 공의회를 소집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12]
3. 6. 외교와 십자군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고, 교황령의 주요 성과 도시들의 통치권을 되찾아 15세기에 교황령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12] 그는 산탄젤로 성을 요새화하고 다리를 놓는 등 로마의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12]1394년 아비뇽에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한 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선출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바츨라프 4세 등으로부터 교황직 사임 압력을 받았으나 거부했다.[12] 서구 대이교를 종식시키기 위해 세계 공의회 소집 요구가 있었으나,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2]
보니파시오 9세의 치세 동안 로마에서는 두 차례 성년이 지켜졌다. 1390년의 성년은 전임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언한 것으로, 독일,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잉글랜드 등지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했다.[12] 1400년의 성년에는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았다.[12]
1399년 후반에는 '비안키' 또는 '알바티'라고 불리는 채찍질 고행단이 등장하여 종교적 열풍을 일으켰다.[12] 이들은 흰옷을 입고 붉은 십자가를 그린 채 행진하며 종말론적인 소문을 퍼뜨렸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처음에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지도자를 화형에 처하고 결국 해산시켰다.[12]
잉글랜드에서는 존 위클리프가 교황의 성직 임명 관행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12] 보니파시오 9세는 성직록의 첫해 수입 일부를 교황청에 귀속시키는 제도를 도입했으나, 잉글랜드 의회는 교황 임명권에 대한 거부권을 부여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반발했다.[12] 결국 보니파시오 9세는 잉글랜드와 타협했다.[12]
독일에서는 1400년 선제후들이 바츨라프 4세를 폐위시키고 루프레히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으며, 1403년 보니파시오 9세는 이를 승인했다.[12]
1398년과 1399년에 보니파시오 9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를 돕기 위해 유럽 국가들에 십자군을 호소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12]


3. 7. 시성과 대학 설립
보니파시오 9세는 1391년 10월 7일에 스웨덴의 비르지타를 시성하였다.[12] 그는 페라라 대학교(1391년), 페르모 대학교(1398년), 에르푸르트 대학교(1392년) 설립을 도왔다.[12]4. 사망
보니파시오 9세는 1404년에 짧은 병으로 사망했다.[4]
베네딕토 13세는 분열 종식을 논의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협상할 의향이 없던 보니파시오 9세는 사절단과 언쟁을 벌였다. 그는 성직 매매를 비난받아 흥분하여 쓰러졌고, 이것이 사망 원인으로 여겨진다.[9] 이후 인노켄티우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역시 베네딕토 13세와의 협상을 무시하여 분열은 계속되었다.[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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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Vat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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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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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Boniface 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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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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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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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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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아빠스(라틴어: Abb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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